운동경기 관람하는 것 자체를 별로 반겨하지 않는 나의 개인적 취향과 별개로 올림픽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올림픽은 국가와 기업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의해 언제나 그들에게 좋은 기회로 이용되어 왔고 그 사이에 개인은 온 정신을 다 빼앗겨 그들의 전략에 휘말리게 된다. 이번 올림픽 역시 이러한 과정을 확인시켜주는 거대 이벤트이다. ------------------------------------------- [대학로 산책] 제1506호 2008-08-11:(퍼옴)
동북아의 갈수록 습하고 뜨거워지는 여름이 바캉스의 맛을 한층 돋아주는 계절이다. 사생활의 상당 부분을 직업 활동의 연장 근무로 애매하게 소모당하는 한국인들에게 바캉스는 그야말로 절치부심의 개인적 시간이다. 조직의 쓴 맛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산으로 바다로 피난가는 전투적인 바캉스는 한국인 현대문화의 주요 항목이다. 그런데 이래저래 올여름은 좀 특별해서 한국과 동북아의 개인들이 국가의 불호령을 벗어나기가 어지간히 어려울 모양이다. 올림픽, 독도사태, 게다가 금강산 사건! 그 가운데 뭐니 뭐니 해도 올림픽의 위력은 가히 메가톤급이다.
올림픽만큼 위선적이고 뻔뻔한 물건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어지간히 뱃심 좋은 독설가나 대중의 지지를 포기한 미디어가 아니면 감히 비판 못하는 것이 올림픽이다. 스포츠정신, 인류 평화, 지구촌 축제 등 미사여구를 늘어놓자면 한이 없다. 그렇지만 글자 못 깨친 사람들도 올림픽의 실체가 천문학적 이윤이 난무하는 거대 비즈니스라는 것쯤은 다 알 것이다. 메달 개수를 둘러싼 낯 뜨거운 경쟁, 주식 시세판을 베낀 메달 성적표, 게다가 도시재개발의 막대한 이익분배를 둘러싼 정부와 기업의 게임, 거대 미디어들의 돈잔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중국은 올림픽을 빙자해서 그 동안 못 해치운 압축 성장 숙제를 모조리 때려치우는 중이다. 불법 거주자 소탕, 북경시 리모델링 밀어붙이기, 노점상 추방, 뒷골목 공장 문 닫기 등 국가가 국민을 줄 세우는 갖가지 프로젝트가 절정에 도달해 있다. 매일 아홉시 뉴스 시작과 무섭게 아리따운 미녀 앵커가 상기된 목소리로 반시간 동안 숨 돌릴 새 없이 내보내는 중국공산당의 올림픽 프로젝트 뉴스제목은 “중국, 드디어 강대국으로 복귀 완료!” 영어로 의역하면 “원 월드, 원 드림.” 개혁개방 공권력이 세련되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위력적임을 과시하는 거대 국가 프로젝트 제목으로 참 적당하다.
동아시아는 국가가 개인보다 항상 강한 지역이다. 개인의 국가에 대한 의무는 눈덩이처럼 부풀려지고 국가의 개인에 대한 책임은 흐지부지되는 게 다반사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국가와 개인의 수직 서열화 모델을 제시해서 이런 상황을 조성한 원조는 중국이다. 티베트의 유혈 시위, 잇따른 폭탄 테러, 올림픽을 나흘 앞둔 카시가르 위구르족의 테러는 중국공산당의 거대국가 프로젝트로서의 올림픽에 대한 저항이다. 그러나 그 저항은 천문학적 이윤이 난무하는 올림픽 비즈니스의 토대를 흔들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중국은 물론 다른 참가국들도 제각기 몫을 챙기느라 눈에 핏발을 세우는 마당에, 그들의 저항은 속절없이 몇몇 NGO들의 동조시위로 메아리칠 뿐이다.
우리라고 중국의 국민 줄 세우기 프로젝트를 비난할 수 있을까. 미성년자 화랑·관창의 죽음을 미화하고 계백의 소름끼치는 저항도 미화하는 나라, 아이들에게 개인적 취향은 버리고 교복입고 머리 깎으라고 다그치는 나라, 조국근대화를 위해 청춘을 저임금 노동으로 날린 사람들에 대해 별 관심 없는 나라, 돈 많고 힘센 집 자식들 이래저래 빠져나간 군대 가서 온갖 고생 다 하지만 최저임금도 안 주고 대체복무는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하는 나라. 우리도 중국의 국민 줄 세우기를 마냥 탓하기에 그리 떳떳하지는 못하다.
And then he again uneasily saw, as he had latterly seen with more and more frequency, the scorn of Nature for man's finer emotions, and her lack of interest in his aspirations.
-Jude the Obscure 141쪽-
주드가 품은 연정의 감정을 고스란히 유지시켜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보란듯이 조롱할 뿐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 운명 때문인가, 주드의 비극적 결함 때문인가, 세상이 원래 그렇기 때문인가.
값어치를 모르는 인간에게 진주를 던져줄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나 아킬레스건과 컴플렉스가 있다. 그 컴플렉스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참 좋겠으나 인간이 그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컴플렉스 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겠나.
자신의 이전 자아를 부정하고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인간에게 굳이 내가 그것을 들먹일 필요는 없겠고 다만 내가 너에게 "선심" 을 베풀었다고 생각해 주지. 그것은 어쩌면 너의 억눌림의 표출이었고 강한 자기애를 지녔던 너의 비겁하고 유약한 자기보호 본능이라는 걸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래, 너의 약점과 컴플렉스를 없었던 일처럼 덮어주지.
지극히 평범한 나같은 사람이 고통이니 아픔이니 하는 말들을 쓴다면 호들갑을 떠는 것일 게다. 조지 엘리엇의 Middlemarch를 읽을 때는 수많은 파편화된 나의 모습들을 그녀의 작품 속에서 확인하는 것만 같았다. 내 안에는 리드게이트도 있었고 도로시아도 있었으며 열정적인 윌 래디슬로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그려나가는 작가의 손길에서 독특한 개성을 지닌 한 인간을 그려내기 위해 작가는 그 인간을 얼마나 깊이 있게 탐색하고 관찰하는 과정을 겪은 것일까? 또 그러한 인물은 정치, 경제, 사회의 큰 흐름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작가인들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엘리엇의 문장들은 내가 직접 읽어보기 전에는 느낄 수 없는 그녀만의 '아우라(aura)'가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하는 비평서 같은 것들은 필요치 않았다. 아니, 비평서를 들춰보고 싶지 않았다.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지켜 보면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들을 꺼내 보며 반추할 수 있었고 내 주변에 있는 타인들의 모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맛에 작품을 읽는 건지도...
황폐해져가는 농촌의 모습이 그려진 하디의 Jude the Obscure는 그 옛날 시골 외할머니집을 떠올리게 했다. 스산하고 쓸쓸한 풍경은 어린 내 눈에도 읽혀지던 퇴락해가는 농촌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암울하고 좁은 공간에서 크라이스트민스터를 향한 동경을 키워 온 어린 주드의 눈에 비춰진 신학과 학문의 세계는 어쩌면 허상이었는지도. 헛점과 모순 투성이의 세상은 순수한 영혼 주드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했다. 그러나 주드는 이 비루한 세상에 굴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수 브라이드헤드는 진보인 척 하지만 실은 스스로의 덫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나약하다.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주드의 영혼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보듬어 준다.